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사 관련 정보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 [youtube(YoW2WYdOsvg)] 그러나 다이쇼 시대로 대표되는 좋은 시절도 잠시였다. 점차적으로 농민들에게서 걷는 세금이 점점 높아졌고, 상황이 다급해진 농민들은 [[도쿄]]와 같은 대도시로 몰려가 하층민을 이루기 시작한다. 당시 [[관동 대지진]] 때 마구 나눠준 채권의 가치가 폭락할 거란 소문이 돌면서 1927년 초에 전국적 대공황이 발생하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하층민의 대부분을 이룬 청년 세대가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릴 혁명"을 요구하기 시작했지만, 1929년에 발생한 [[세계 대공황]]으로 2연타를 맞아 경제가 보이지 않는 수렁에 침식하면서 마침내 군부가 폭주하기 시작하였다. 세계 대공황 당시, 미국은 기본적인 경제적 체급이 이미 전 유럽과 맞먹을 정도인 데다 공공 건설을 늘리는 뉴딜 정책이 성공하면서 다시 극복했고, 영국과 프랑스 등 기존 열강들은 막대한 식민지를 이용한 블록 경제를 통해 어느 정도 극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일본은 그럴 수 없었을뿐더러 처음부터 경제 체제가 이들 국가에 비해 미약했다. 일본뿐만 아니라 1차 대전에 패배하면서 안그래도 부족한 식민지를 전부 잃어 큰 위기를 맞이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결국 [[나치당]]에게 정치적 헤게모니를 빼앗기며 [[나치 독일]]로 재탄생, 1차 대전의 승전국임에도 기껏해야 배상금 일부와 티롤 지방 정도만을 받은 [[이탈리아 왕국]]도 공황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군부가 정권을 획득하며 2차 대전의 씨앗이 싹튼다. 결국 이 세 국가들은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물든 채로 1930년대를 맞이하였고 서로간의 동맹을 맺으며, [[추축국]]이 된다. 군부 세력이 권력을 차지한 이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더욱 더 미쳐간 일본은 중국을 침략해 [[만주국]]을 세우고 [[중일전쟁]], [[난징대학살]]을 일으키며 온갖 패악, 깽판을 벌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점점 폐단이 심해지고 있었으며,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대아시아 확장정책에 반감을 느낀 미국이 '계속 그렇게 놀면 [[석유]] 등 중요 물자를 안 팔겠다'는 초강수로 나서자, 이성을 잃은 일본 군부는 [[미합중국 해군|미 해군]]의 중핵인 [[하와이]] [[진주만]] 기지를 전격 기습하는 최악의 수를 두고 본격적인 대미전쟁을 일으켰다([[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권 전체를 순식간에 침략하여 싸그리 식민지로 만드는 등 야심을 키웠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결정적인 대패, 일본 [[해군]] 연합함대의 중추 전력을 이때를 기점으로 상실했다. 또한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압도적인 체급으로 버티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전술, 전략적인 성과를 내며 선전했고, 이로 인해 일본군 전력의 상당 부분이 중국 전선에 묶이게 되었고, 의미없는 소모전이 강요되었다.[* 중국(중화민국)은 이때의 공으로 전후 상임이사국이 되었고, 미국의 루즈벨트가 장제스에게 오키나와를 넘겨준다고 제안하였으나, 장제스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후 이미 전쟁을 수행할 만한 물자와 기반이 한계에 다다른 일본과는 달리 타국과의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쉴새없이 터져나오는 미국의 압도적인 공업생산력에 밀려 일방적으로 미 공군의 공습에 본토가 유린당했으며 [[반자이 어택]] 및 [[카미카제]]와 같은 기행을 반복하며 전력만 소모했다.[* 일본군은 [[MXY-7 오카]], [[가이텐]], [[신요]] 등의 대표적인 자살공격 병기로 [[미합중국 해군|미해군]]을 공격하였다. 결과는 알다시피 무용지물이었고 실상 이미 고갈되어가던 소중한 인적, 물적자원들을 낭비하고 버리는 기행의 연속이었다.][* 일본이 19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근대화에 성공하고 20세기 초반엔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할 정도로 급격히 성장했지만 여전히 무사도, 정신수련, 할복 같은 시대착오적인 것을 숭상하는 전근대적인 국민성과 그로 인해 나타난 정치, 군사시스템의 후진성이 이 부분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즉 겉으로 보기엔 구미권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패권국이었으나 내실은 텅 빈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런 단점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 1960~8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뒤늦게 바뀌어갔다.] [youtube(erJOEyRRgLE)] 일본이 정신나간 기행을 반복하며 항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하자 미국은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원자폭탄을 터뜨린다.]] 사실 도쿄 대공습이 있었던 시점에서 이미 전쟁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본토의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한 일본은 일상적으로 폭격을 당하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대놓고 미군기가 일본 본토 상공을 비행하면서 안전하고 쉽게 원자폭탄을 투하할 수 있었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이유에 대해 [[소련군]]이 한반도 근처까지 진격해 오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소련군이 [[만주 작전|일본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8월 8일]]로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히로시마|8월 6일]] 후의 일. 사실 미국은 친소 성향의 루즈벨트 행정부 당시 소련이 전쟁에도 참여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었으나 반소 트루먼 행정부가 들어선 후 극동에서의 소련의 지분을 최소화하려 하였고 소련 견제가 원자탄 투하의 여러 목적 중 하나가 맞긴 했다. 일본은 원자폭탄을 맞아도 절대 항복하지 않고 [[죽창]]을 잡을 것이며, 일본군의 저항도 상당하리라고 미국이 과대평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이미 원폭이 먹히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시나리오로 [[1946년]]을 겨냥한 [[올림픽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자마자 곧바로 항복하면서 그럴 필요는 없게 되었고, 태평양 전쟁에서 경험했던 격렬한 일본군의 저항과 이로 인한 미군의 큰 손실과는 다르게 이미 [[독소전]]에서 지옥을 맛봤던 소련군은 오합지졸이던 만주의 관동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며 [[한반도]]까지 진격했고 해상에서도 일방적으로 일본군을 몰아붙여 사할린과 쿠릴 열도 전역을 차지했다.[* 당황한 미국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소련에게 한반도 38도선 양분을 제의하고, 이것은 한반도 '''남북 분단'''의 시초가 된다.] 여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사정은 [[제2차 세계 대전]] 항목 참조. 이로써 [[일본 제국]]은 패망하고 강점하였던 식민지와 점령지가 해방되었으며, 일본은 주권을 상실하고 연합군 점령하에 들어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